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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끈적이는 시간의 손길

[28]-끈적이는 시간의 손길 

식별번호|VI-0000028

제목|[28]-끈적이는 시간의 손길

설명|1953년의 부룩클린. 남자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하면서, 오펠리아란 이름의 매혹적 흑인 여성과 살고 있는 펄프 픽션 작가인, 터크하딩. 그녀는 어느 날 거리를 걷다 자신의 옛 친구 아이작을 발견한다. 길 모퉁이로 사라진 아이작을 쫓아가던 터크는 불현듯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 조금 전과 동일한 공간이지만 완전히 이질적인 사람들과 분위기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터크는 집으로 돌아와 오펠리아를 부르지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은 오펠리아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임머신의 힘도 빌리지 않고 수십 년의 시간대를 훌쩍 뛰어넘어 1999년의 뉴욕, 부룩클린에 도착한 것이다. 1999년의 브룩클린. 드류는 가스스토브에 머리를 처박고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자살을 실패하지만, 유서에 휘갈겨 놓은 삶과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고민은 여전히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다. 1953년의 여성작가와 1999년의 여성작가가 동일한 장송에서 ‘끈적거리는 시간의 점액질’을 촉매로 (영화에서 이 두 여성들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마다, 이들의 얼굴에는 실제로 끈적거리는 점액질의 액체가 묻는다) 신비스러운 만남을 가지면서 사건은 급박하게 전개된다. 머리에 총을 맞고 죽게 되는 터크, 이를 목격하는 어린 시절의 드류와 현재의 그녀, 이 모든 ‘시간 거스르기’에서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오펠리아와, 시간을 초월하여 터크와 드류를 안내하는 아이작. 영화는 시각적인 스펙타클이 아닌 심리적인 SF와 스릴러 형식을 본뜨면서 이 모든 사건과 인물들의 복잡한 얽힘을 그려낸다. ‘근대 이후 시계의 발명과 함게 당신의 상상력을 옥죄어 왔던 인위적으로 절단된 시간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라. 시간성의 역류나 혼재를 의미하는 흑백과 칼라 영상들의 흐름에 시선을 자유롭게 고정시키고, 당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을 발휘하라. 그런 다음 이해가 아닌 의미부여와 해석은 바로 당신의 몫이다’ 바로 이와 같은 관객의 시선을 요구하는 까닭에, <끈적이는 시간의 손길>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영화이다. 대부분의 ‘시간여행’ 영화가 선형적인 시간성을 재부여하기 위해 동원하는 설명 장치들 없이, 50년대와 90년대의 시간, 그리고 그 두 개의 시간 체험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70년대의 시간이 마구잡이로 섞여있다. 그러나 삶에서 ‘오로지’ 현재이거나 미래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과거의 흔적을, ‘소망’이라는 형식으로 미래를 담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따라 잡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교차하는 시간성속에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영화의 형식만큼 난해하지는 않다. 시간을 거슬러 이루어지는 두 여성작가의 정신적인 교감과 사랑, 여성적인 글쓰기 과정을 채우는 의지와 상상력, 직관에 대한 예찬은, SF에서 필름 누아르까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탈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이 영화의 주된 의미이다. <출처 : 2000 Seoul International Queer Film & Video Festival 카탈로그>

감독|힐러리 브라우어

기록유형|영상류

입수경로|기증(서울퀴어아카이브)

식별번호|VI-0000028

제목|[28]-끈적이는 시간의 손길

설명|1953년의 부룩클린. 남자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하면서, 오펠리아란 이름의 매혹적 흑인 여성과 살고 있는 펄프 픽션 작가인, 터크하딩. 그녀는 어느 날 거리를 걷다 자신의 옛 친구 아이작을 발견한다. 길 모퉁이로 사라진 아이작을 쫓아가던 터크는 불현듯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 조금 전과 동일한 공간이지만 완전히 이질적인 사람들과 분위기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터크는 집으로 돌아와 오펠리아를 부르지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은 오펠리아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임머신의 힘도 빌리지 않고 수십 년의 시간대를 훌쩍 뛰어넘어 1999년의 뉴욕, 부룩클린에 도착한 것이다. 1999년의 브룩클린. 드류는 가스스토브에 머리를 처박고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자살을 실패하지만, 유서에 휘갈겨 놓은 삶과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고민은 여전히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다. 1953년의 여성작가와 1999년의 여성작가가 동일한 장송에서 ‘끈적거리는 시간의 점액질’을 촉매로 (영화에서 이 두 여성들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마다, 이들의 얼굴에는 실제로 끈적거리는 점액질의 액체가 묻는다) 신비스러운 만남을 가지면서 사건은 급박하게 전개된다. 머리에 총을 맞고 죽게 되는 터크, 이를 목격하는 어린 시절의 드류와 현재의 그녀, 이 모든 ‘시간 거스르기’에서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오펠리아와, 시간을 초월하여 터크와 드류를 안내하는 아이작. 영화는 시각적인 스펙타클이 아닌 심리적인 SF와 스릴러 형식을 본뜨면서 이 모든 사건과 인물들의 복잡한 얽힘을 그려낸다. ‘근대 이후 시계의 발명과 함게 당신의 상상력을 옥죄어 왔던 인위적으로 절단된 시간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라. 시간성의 역류나 혼재를 의미하는 흑백과 칼라 영상들의 흐름에 시선을 자유롭게 고정시키고, 당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을 발휘하라. 그런 다음 이해가 아닌 의미부여와 해석은 바로 당신의 몫이다’ 바로 이와 같은 관객의 시선을 요구하는 까닭에, <끈적이는 시간의 손길>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영화이다. 대부분의 ‘시간여행’ 영화가 선형적인 시간성을 재부여하기 위해 동원하는 설명 장치들 없이, 50년대와 90년대의 시간, 그리고 그 두 개의 시간 체험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70년대의 시간이 마구잡이로 섞여있다. 그러나 삶에서 ‘오로지’ 현재이거나 미래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과거의 흔적을, ‘소망’이라는 형식으로 미래를 담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따라 잡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교차하는 시간성속에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영화의 형식만큼 난해하지는 않다. 시간을 거슬러 이루어지는 두 여성작가의 정신적인 교감과 사랑, 여성적인 글쓰기 과정을 채우는 의지와 상상력, 직관에 대한 예찬은, SF에서 필름 누아르까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탈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이 영화의 주된 의미이다. <출처 : 2000 Seoul International Queer Film & Video Festival 카탈로그>

영어 제목|The Sticky Fingers Of Time

감독|힐러리 브라우어

감독 원어|Hilary Brougher

제작국가|미국

제작년도|1997

상영시간|90분

타입|35mm

흑백/칼라|b&w

화질|

자막|

소장형태|VHS

공식상영기록|2회 서울퀴어영화제

장르|드라마

원제목|The Sticky Fingers Of Time

생산일시|1997

기술자|루인

언어|영어

공개구분|공개

기록유형|영상류

입수경로|기증(서울퀴어아카이브)